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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는 이야기 】/▶서울 자양 초등학교

나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양 초등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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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글은 " 나의 아들에게 들려 주는 자양  초등학교 이야기 " 라는 제목으로 자양 60년사 책자에 수록된 내가 작성한 29기

     회고담이다.

     더 늦기전에 자양 60년사 책사를 발행하니 혹시 부모님들중에서 자양 초등학교를 나오신분이 있거나 고증을 할만한 자료

     나  사진을 가지고 계신분은 연락을 바란다는 아들의 가정 통신문을 보고 아버님이 자양 초등학교의 전신인 자마장 학원

     (아랫 메뉴 자양 60년사 참조) 6회. 9회 졸업생인 관계로 아버님 졸업 사진을 보내 드렸더니 우리 29기의 졸업 사진과

     또  다른 자료도 보내달라는 나종국 교감 선생님의 부탁으로 몇 가지 사진을 더 보내드렸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자양 60년사 책사에 선배 졸업생들의 당시 회고담이 기수별로 몇편 있었으면 좋겠다 하여 나에게

     29기를 대표해서 써줄 수 있겠냐는 권유에 글을 쓸만한 능력도 안되고 당시를 크게 기억할만한 추억도 없는것 같아

     한사코 고사(?)했으나 선배들의 회고담이 없다는 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없어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쓴글이다.

     원래는 아랫글이 원문이나 내용이 조금 길어 자양 60년사 책자에는 내용이 조금 줄어서 수록되었다.

     기존 하드에 있는 " 나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양 초등학교 이야기 "  화일을 바로 첨부해서 올리려 했더니 예전엔 이 화일

     이 올라갔는데 이상하게 다음측에서 용량 제한(3Mb)을 걸어서인지 이젠 안 올라가네 !!

     (원인은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엑셀에서 기본적으로 지원하는 사진 화일이 비트맵 이미지인데 이 형식은 이미지를 그대로

      저장하기 때문에 편집이 용이하고 원본은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형식이지만 압축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이 커질수록

      용량도 커진다고 한다.

      내가 작성한 이 글도 비트맵 이미지 사진 첨부가 꽤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용량이 3.4Mb로 커져 화일 첨부가 안되는것

      같다.)

 

    허여. 할 수 없이 엑셀에 들어 있는 사진을 전부 들어내 그림판에서 JPG로 확장자를 변경하여 이 글을 다시 올린다.

    이 작업은 꽤 시간이 걸릴것 같지만 그래도 오늘은 공휴일이라 시간이 있어 하루 종일 이 작업을 하려한다.

    혹시 중간에 들어 오는 친구들 " 글이 왜 이래 " 하지 말고 오늘 오후쯤이나 저녁에 느긋하게 들어와 커피 마시면서

    이 글을  읽고 잠시나마 잊혀졌던 33년전  우리 자양 초딩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 나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양 초등학교 이야기 --

 

                                                                                                                                                               2005.8.8

 

 

사랑하는 나의 아들 정호 보아라 !!!

10여년 전 태어나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던 네가 벌써 훌쩍 커서 자양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구나

생일이 늦어 제대로 학교 생활을 할까 하는 아빠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듯 나름대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가는 너의 모습을 아빠는 말은 안했지만 항상 대견해 하고 있다.

오늘은 아빠가 네게 아빠의 어렸을때 자양 초등학교 생활에 대해 아야기해주마

아빠도 너와 같은 자양 초등학교이고 29회 졸업생이니깐 너와는 학교 동문이구나

너의 아빠이면서 학교 선배가 되는구나

그러고 보면 너의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정호까지 3대가 자양 초등학교 동문이니 3대가

초등학교로 동문인 집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많지 않으리라 본다.

아빠는 1962년생으로 아빠 8살 되던해인 1969년에 입학을 해 1975년에 졸업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이상된 아빠의 초등학교 시절이 잘 떠오를리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생각나는 아련한 기억을 네게 이야기 해주련다.

 

1. 학교 건물

 

 (1)정문 건물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지금은 4층 건물이지만 아빠 학교 다닐땐 이렇게 1층 단층 건물이었다.

 

 (2)좌측 건물

좌측 건물은 지금과 같은 4층으로 현재 그대로인것 같다. 

 

 (3)우측 건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측 건물은 제일 나중에 지어진 신축 건물로 3층이었는데 지금은 4층 건물이니깐

알 수는 없지만 어느해인가 1층을 더 올리는 증축 공사를 했나보다.

 

2.학교 생활

 

 아빠 6학년은 4개반으로 한 반당 남, 녀 합쳐서 약 88명었으니 참 많았지

 정호 지금 네반은 한 30명 정도이니 아빠땐 너보다 약 3배 정도 많았나 보다.

 대신 교실은 지금보다 약간 컸던걸로 기억한다,

 당시 아빠가 사용하던 교실 내부를 볼래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반에 학생이 꽤 많아 보이지 ?

 아빠 졸업 사진에는 한반에 보통 88명이었다.

 그땐 그렇게 짝궁하고 2명씩 앉았었다.

 책상과 의자는 모두 나무였고 아주 낡았던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반의 대표를 회장이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땐 반장이라고 했다.

 반장과 더불어 부반장이 있었고 그 줄의 대표인 분단장이라는 제도도 있엇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이 어두워서 잘 안보이겠지만 교실 바닥은 나무로 되있어 항상 왁스와 양초로

 수업이 끝난후 청소 당번들이 반짝 반짝 광을 내어야 했다.

 당시 그 나무 마루 광을 내다가 바닥의 나무 가시에 아빠가 손을 찔린 기억이 생생히

 나는구나

 사진에서처럼 왁스칠은 안하고 장난만 치는 친구도 있었지

 점심 시간이 되면 집에서 직접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는데 아빠땐 집에서 직접 도시락을

 싸와야 했다.

 (지금은 학교 급식으로 바뀌었으니 도시락을 싸가지 않아 편해 좋지 ?)

 그런데 집이 어려운 친구들은 그나마 이런 도시락 조차 싸오지 못해 점심을 굶는 친구들도

 있었다.

 반찬으로는 거의가 김치에 짠지 무침, 콩나물, 덴뿌라(오뎅 볶음)였고 잘 사는집 아이는

 계란으로 계란 프라이,계란말이, 쏘세지를 사왔다.

 그리고 도시락(아빠땐 벤또라는 일본말도 잘 썼다.)을 까 먹기전 반드시 선생님의 혼식

 이행 여부 검사가 있었다,.

 혼식이란 당시 나라 경제가 어려워 정부 시책으로 반드시 보리를 일정량 이사(30프로 이상)

 을 쌀과 함께 섞어 밥을 지어 먹도록 했단다.

 당시는 하얀 흰쌀이 부족해 쌀에 보리를 섞어 먹도록 강제로 규정했고 이를 어기는 학생은

 선생님의 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보리밥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는 하얀 흰쌀밥을 위장하기 위해 위에만 보리와 쌀을

 섞은  혼식으로 하고 밑에는 하얀 흰쌀밥 그대로 였으나 그게 탄로나 도시락은 먹지도

 못하고 그 도시락을 머리 위에 들고 벌을 서는 친구도 있었다.

 이 혼식 밥을 해먹는 강제 제도는 아빠 중학교때가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3.냉방, 난방

 

여름이 되면 너무 덥고 겨울이 되면 너무 추웠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 교실마다 난로가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과 같이 조개탄에 불을 피워 사용하는것으로 꽤 따뜻했단다.

이 난로를 사용할때는 항상 난로 당번이 있어서 불을 꺼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난로위의 도시락이 보이지 ?

겨울에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그대로 먹을 수 없어 난로위에 있는 도시락을

당번이 수시로 위, 아래를 바꿔 놓아 골고루 따뜻한 도시락이 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잘못되어 열을 너무 받은 도시락은 종종 도시락 밑에 누릉지가 덤으로 생기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에어컨에 가스 보일러에 원하는 데로 따뜻하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지만 그땐

그런것이 없었지

뒤돌아 보는 시절이지만 왜 그땐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지 ...

특히 겨울은 지금보다 더 추워 아이들 손은 한겨울이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

이것을 손이 튼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리 어려운 집 아이들도 손트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

지금은 가스 보일러 켜고 수도 꼭지만 올리면 한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꽐꽐 나오지만

그 당시에는 연탄이라는 것이 있어( 어쩌면 연탄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 )

그 연탄을 때 방을 따뜻하게 하는 난방과 세수를 할 수 있도록 차가운 물을 솥안에 넣고

그 솥을 연탄 위에 놓아 따뜻한 물을 만들어 그 물로 세수와 양치를 해결했다.

뜨거운 물이 없어서 자주 씻지 못하고 날씨는 너무 추워 손등이 갈라지는 것이지

이 연탄으로 겨울에 난방을 하다보면 방 구들 사이로 연탄 가스가 스며 들어와 이 연탄

가스를 마시고 죽은 아빠 친구들도 당시에는 몇몇이 있었다.

아빠 어렸을때 할머니가 한겨울에 이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게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 1~2번은 꼭 갈아주어야 했다.

아빠가 이렇게 건강하게 큰것도 다 할머니 덕이니 정호도 할머니에게 잘해야 한다.

 

4.먹을거리

 

 아빠만 그런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땐 다 어려웠지

 먹을것이라고는 지금보면 불량 식품이라 할 과자와 눈깔 사탕이 전부였지

 쫀디기, 달고나, 뽑기, 자야 과자, 라면땅, 뽀빠이(지금의 뿌셔뿌셔와 같음), 병 우유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병 우유 사진이다.

 지금은 거의가 종이로 된 팩 우유가 주종이나 그땐 사진처럼 병으로 된 우유였다.

 아빠 2학년때인가 ? 3학년때 ...

 이 우유 먹을 사람 신청을 받아 우유를 먹었는데 한 일주일 먹었더니 할머니가 돈이 없다고

 끊고 그만 먹으라고 한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 이 우유 뚜껑은 종이로 상단부가 막혀 있어 잘못 따면 종이로 된 뚜껑이 꼭 우유 내부

 로 들어가서 그걸 손가락 또는 젖가락으로 다시 꺼내먹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우유를 정호는 왜 그렇게 싫어하니 ?

 그리고 지금의 아이스크림인 아이스께끼, 단순히 설탕물 녹인것에 불과했지만 왜 그땐 그게

 그렇게 맛이 있었던지 모르겠다.

 동내에 아이스박스 통을 들고 그 안에 아이스께끼를 담아 " 아이스께끼 " 하면서 들고 다니

 던 아저씨가 이제는 그리운 사람, 그리운 시절이 되었나 보다.

 엿장수 아저씨가 오면 엿바꿔 먹으려고 온갖 집안의 쇠로 된 고물을 다 갔다주고 엿을

 바꿔 먹었는데 그중에서 신주라고 하는 황동으로 된 쇠를 갔다주면 엿을 제일 많이

 바꿔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이 무엇을 만들던 기구인지 알겠니 ?

 달고나를 만들던 기구이다

 여기에 설탕을 넣고 녹인 다음에 소다를 넣으면 크게 부풀어 오르는데 꺼내서 넓적하고 둥근

 판으로 누른 다음 식혀서 먹기도 하고 별이나 여러 모양이 그려진 판으로 꾹 누르면 그

 모양이 달고나에 새겨지는데 그대로 떠가면 아저씨가 보너스로 한개 더 주곤 했다.

 

5. 놀이와 아동 잡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빠 어렸을땐 컴퓨터가 있었을리 만무이고 학교만 갔다오면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다.

학원도 없어 학교만 갔다와서 숙재만 하면 온통 놀 수가 있었지

그런데 지금의 정호와 마찬가지로 아빠도 학교 갔다오면 숙제부터 먼저하고 노는게 아니라

하루종일 먼저 놀다가 저녁이 다되어 겨우 숙제를 하느라 할머니에게 곧잘 혼이 났단다.

아빠도 그랬으면서 학교 갔다오면 정호에게 숙제부터 먼저 하라니 조금 말이 안되지?

근데 너도 이담에 커서 아빠되면 그럴꺼야 왜 그런지는 너도 커보면 알게되 !!

게임기나 비디오, 컴퓨터가 없으니 주로 친구들하고 많이 놀았다.

다방구, 말뚝 박기, 자 치기, 비석 치기, 술레 잡기, 제기 차기, 고무줄(주로 여자아이들이 

았지) ....

그런데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남자 아이들이 짓궂게 면도칼로 고무줄을 끊어 

버리곤 했다.

그러다 선생님에게 걸려 혼나기도 하고 ...

종이로 접은 딱지 치기도 하고 ...

땅시엔 딱기 치기해서 딱지를 많이 딴 친구 녀석이 제일 부러웠지

다달이 발행되는 소년 잡지는 만화를 즐겨보고 소년 잡지보다는 때로는 장난감으로 첨부되는

부록을 사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졸라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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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사진은 판박이다.

지금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걸 보니 정호도 이게 무슨 용도인지는 알겠구나 !!

주로 책과 책 받침에 많이 붙였는데 집에서는 벽이나 문에 붙혔다가 혼나는 일도 있었다.

그중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판박이였다.

(아톰, 뽀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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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제일 좋아한 아톰 딱지

신문지로 접어서 만든 사각 딱지도 잇었으나 사진과 같이 만화 주인공을 칼라로 인쇄해 

문방구에서 파는 동그란 종이 딱지가 인기가 더 많았던것 같다

( 동그란 부분에 반칼 작업이 되있어 그냥 떼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

 

 

6. 텔레비죤( TV )

 

기억이 오래되 아빠집에 처음  텔레비죤이 들어온지는 기억 할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집보다는 일찍 할아버지께서 사오신것으로 기억한다.

텔레비죤이라 해봐야 당시는 칼라도 아니고 흑백이었지만 아빤 할아버지가 이 텔레비죤을

사올때가 초등학교 시절중 제일 행복했다고 느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텔레비죤으로 만화 영화를 많이 보았으니깐 ... 

당시에 아톰이라는 로봇이 악당을 물리쳐 지구를 구한다는 만화 영화가 제일 인기였지

당시 우리집에 있었던 텔레비죤은 사진처럼 다리가 달려 있었고 화면 앞에는 문짝이 달려

있어 열고 닫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채널은 손으로 직접 돌려야 했고 ...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TBC 방송국에서 한 여름이면 " 전설의 고향 " 이라는 귀신 옇화를

방송했지

 지금도 기억이 새롭지만 이 귀신 영화 중간에는 " 활명수 " 광고를 했는데 꼭 음악 가사가

" 부채표 활명수 ~~ " 라고 광고했지

나중에는 그 음악 " 부채표 활명수 ~~ " 라는 소리만 들어도 어디선가 귀신이 나올것 같아

소름이 돋았지

이런 귀신 영화를 보는 날은 그 날 저녁 화장실도 못 갔다.

그땐 화장실이 집안에 없었고 밖에 있어 꼭 용변을 보려면 신발을 신고 나가야 했고 화장실

또한 양변기가 아닌 냄새가 엄청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냄새보다는 등뒤에서

나올것 같은 귀신때문에 겁이 나서 용변도 제대로 못 보고 허겁지겁 뛰쳐 나오곤 했다.

 

7.소풍

 

 지금이야 현장 학습이다 해서 1년에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만 아빤 초등학교 당시에는 봄에

 는 소풍, 가을에는 체육 대회 그것으로 끝이였다.

 소풍때면 할머나가 새벽에 일어나셔서 맛았는 김밥을 싸주고 아빠는 그 김밥

 먹는 재미로 소풍을 간것 같다

 소풍도 당시는 차가 없어서 걸어 다녔고 주로 아차산을 많이 간것 같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조선 시대 왕들의 무덤인 헌인릉나 동구릉쪽으로 간것도 같다.

 우스운것은 인부가 용을 죽여 소풍날은 꼭 비가 온다는 소문이 있었느데 그것이 어느해는 곧잘

 들어맞아 소풍의 즐거운 기분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8.기타 추억거리

 

 (1)한강 뚝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 대통령때 한강을 깊게 파고 공원화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아빠

 어렸을때 초등학교 당시은 지금의 육갑문 위로는 한강물이 범람할 것에 대비해 뚝방이

 있었고 여름철 장마때 비가 한강위로 넘쳐 물이 넘실 넘실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그곳에 수영장이 없어 더운 여름철에는 아이들이 학교갔다 오면 엄마, 아빠

 몰래  한강에서 수영을 하고 왔단다.

 ( 멱을 감는 다는 표현을 쓰지 )

 그런데 당시 한강은 모래 채취로 군대 군데 깊은곳이 있어 아런곳에 빠져 죽는(익사)아이

 들이 꽤 있어 부모님들이 한강에는 절대로 못가게 하였다.

 실제로 학교에서 이롷게 한강에 빠져 죽어 졸업 못하는 아이도 있었고 아빠도 헤엄치다

 이런 깊은곳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던것을 어떤 아저씨가 꺼내 주엇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도 더우니 그걸 어기고 친구와 몰래 한강에 가서 수영을 하다 몇 시간 후

 집에 와서 한강에 안갔다고 시치미를 떼곤 했으나 금방 탄로가 났다.

  지금처럼 샤워 시설이 없어 우리들 나름대로 한강에서 잘 씻고 와도 할머니가 몸 검사시 

 햇볕에 비춰보면 봄 어딘가에 반짝이는 모레가 붙어있어 그게 단서가 되 금방 한강에

 갔다 왔다는게 들통이 났거든 ...

 이렇게 해서 걸린 아이들은 한바탕 몽둥이로 맞고나서 " 엄마 다신 안갈께요 " 하고

 무릎꿇고 연신 빌어 위기를 벗어났지

 그리고 초등학교 어떤해인가 ?

 지금의 육갑문위로 그러니깐 강변북로 뚝방이 여름철 장마비가 넘쳐 우리 동네로 물이

 삽시간에 밀려와 지대가 낮은 집들은 침수되고 닭, 돼지가 떠내려 가는 일도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집과 자양 초등학교는 그 어떤 비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지

(2)채변 봉투

 그리고 정호야 !!!

 아랫 사진이 무엇인지 알겠니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

 채변 봉투이다.

 지금이야 의학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으로 몸안에 기생충( 회충, 요충, 편충 ... )울 지니고

 있는 아이들이 적어졌지만 아빠 초등학교때는 1년에 1, 2번씩은 꼭  채변 봉투에 대변을

 담아 학교에 내면 얼마후 검사 결과 구충약을 주었다,

(3)헬리콥터 사건

 4학년때인가 ? 5학년때는 학교 앞에(당시 학교 앞은 논이었다.) 주한 미군 헬기가 불시착

 해 온 동네가 난리가 났지

 우리는 수업중 그 장면을 보고 헬리콥터 구경하려고 뛰어가고 ...

 아빤 그때 헬리콥터를 처음 직접 보았고 날개도 크지만 힘도 엄청나게 크다는걸 알았다.

 고장 수리후 이륙할때 보니깐 사방이 온통 먼지에, 바람에 자갈 돌맹이가 다 뜰 정도였다.

(4)명절( 구정, 추석 )

 지금이야 언제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그땐 잘해야 1년에 3,4번 정도 밖에 고기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구정과 추석때 그리고 집안의 제사때 외에는 고기를 먹기가 쉽지 않았었지

 또, 매년 추섟때면 송편을 찔때 송편이 솔잎 향를 내기 위해 소나무 잎이 필요해 아차산

 에 가 친구둘하고 솔잎을 따와 할머니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5)삐라

  지금도 있기는 하겠지만 보기 어려운것중 하나가 삐라인가 보다.

 지금의 광신 주택 자리에 그전에는 건국 대학교에서 소를 기를던 반쪽 자리 산이 잇었는데

 당시 그곳에 가면 삐라를 주워 올 수 있었다.

 삐라란 북한의 체제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북한의 선전물 종이로 A4용지 반의 반만한

 종이에 그림과 구호를 적어논 종이로 사상이 불순한 내용이라 해서 이것을 파출소나 학교에

 내면 공책과 지우게로 바꿔 주었던 기억이 난다.

 10살된 네게 사상이 뭐고 공산주의, 민주주의, 삐라라는 말를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아빠땐 공산주의자가 아닌 빨갱이였고 뻘갱이는 다 때려 잡아야 된다고 교육 받았다.

 정호 네가 뜻도 모를 반공, 멸공이라는 말과 "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이란

 구호도 아빠때는 꽤 많이 사용했던것 같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아련한 아빠의 자양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들

그때로 돌아 가고픈 마음도 있지만 이젠 시간이 지난 빛바렌 아름다운 추억일뿐 ...

지금 정호가 겪고 있는 평범한 현실도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정호의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자리메김 할때가 올거야 !!! 

그러한 현재의 시간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선 먼저 오늘 하루 하루를 보람차고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 정호야 !!

아빠의 자양 초등학교 이야기는 이것으로 줄이고 네게 아래의 4가지를 부탁하마

 

첫째.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해라 !!!

  어떤일,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었으면 하는게 아빠의 바램이지만 아빤 그렇게까

  지 요구하지 않겠다.

  다만 네가 하는일이 어떤 일이던지 최고는 아니어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라

  우선은 네게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고 네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라

  모든일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그에 따른 보상으로 최고가 되는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 베푸는 삶을 살아라 !!!

  신이 세상을 만들때 행복과 불행을 각각 반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즉. 네가 누리는 행복의 몫은 누군가 나 대신 짊어진 불행이라는 몫의 대가임을 알아라

  내가 가져야 할 어려움과 불행를 그 사람이 대신함으로 알고 항상 베푸는 삶을 살아라

  혹은, 앞으로의 네 인생에 네가 그런 어려움과 불행을 짊어지고 갈 수도 있으니

  남을 탓하지 말고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더욱 더 노력해라 

  네가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해선 그에 따르는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먼저

  알아야 할것이다.

 

셋째.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

  앞으로 남은 많은 시간을 살면서 돈보다 명예보다 좋은게 친구라는걸 알아라

  그것도 어릴적, 지금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나중에는 제일 기억날거야

  집에 친구들 많이 데려오고 또 친구집에 많이 가라

 

넷째, 항상 건강해라

  아빠가 네게 부탁하는 이러한 모든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뮤엇보다도 먼저 건강해라

  죽는날까지 병원 신세 하루도 지지않는 건강을 유지해라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 모두를 유지해 항상 인생을 진지하고 밝게 살아라

  때론 사는게 힘들수도 있겠지만 항상 밝은 얼굴로 건강하게 살기를 부탁한다.

 

 

정호야 !!!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지켜온 자양동 터전

이사 한번 안가고 지켜온 지금의 이 터를 소중히 생각하고 할아버지, 아빠, 고모, 누나가

자양 초등학교 동문임을 잊지말고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라

오랫만에 아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려니 글이 조금 길어졌나보다.

아무쪼록 정호의 현재 시절이 나중에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아름다운 추억, 소중한 시절로

간직될 수 있기를 아빠는 기원한다.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건강한 아들이 되기를 빌며 이만 줄인다

 

 

                         -- 정호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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